
[심연에서 숨을 쉴 수 있을까]
더 내려가고 있다. 굉음 같은 수압이 짓누르는 구간. 어떤 생명체도 발광하지 않는 어둠을 통과하고 있다. (p.281)
주인공 경하는 5월 광주 항쟁에 관한 글을 쓴 뒤 그 후유증으로 괴로워 한다. 끔찍한 세상에 질려 있다. 회의감에 빠져 자기 삶조차 포기하기 직전, 몇십년 지기 친구 인선에게 연락이 온다.
인선은 제주도 시골에서 홀로 목수일을 하고 있다. 작업 중 손가락이 잘려 서울 병원에 이송왔다.
인선은 경하에게 시골집에 있는 애완 앵무새 아마에게 밥을 챙겨달라고 부탁한다. 오늘까지 밥을 안 주면 아마가 굶어 죽을 수도 있다고 한다.
경하는 급히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로 가지만 심각한 폭설이 내리는 상태다. 버스도, 사람도 없는 시골길에서 몇 번이나 오늘은 포기할까 생각한다.
하지만 인선이 얼마나 아마를 사랑하는지 알기에 끝내 포기하지 않고 눈밭을 헤쳐 집에 도달한다. 중반부까지 책을 읽는 내내 제발 아마가 살아있기를 바랐는데, 아마는 이미 죽은 상태였다.
시고 끈적이는 눈물이 다시 솟아 상처에 엉긴다. 이해할 수 없다. 아마는 나의 새가 아니다. 이런 고통을 느낄 만큼 사랑한 적도 없다. (p.152)
하물며 동물이라도, 그것도 남이 기르던 애완새라도 죽음은 가슴이 아프다. 본인의 작품을 위해 아마의 죽음의 몇 백, 몇 천배에 달하는 고통을 마주해야만 했던 경하의 가슴은 이미 너덜너덜했을 것이다.
죽으러 왔구나, 열에 들떠 나는 생각한다. 죽으려고 이곳에 왔어. (p.172)
[굳이 심연에 들어가 숨을 쉬어본다]
경하와 인선이 처음 만났을 무렵 둘은 취재를 위해 산을 오른다. 거기서 설화를 듣는다. 한 마을이 자연재해로 물에 잠긴다. 신의 가호를 받은 한 여자만이 산을 올라 죽음을 피했다. 하지만 신은 한 가지 조건을 건다. ‘산을 다 오르는 동안 절대 뒤돌아 보지 말 것’. 하지만 그녀는 산을 넘기 직전 뒤돌아 보고 끝내 돌이 되고 만다.
그 때 돌아보지만 않으면 자유인데… 그대로 산을 넘어만 가면. … 두 발이 돌이 되어 놀라는 여자의 모습이 그 순간 눈앞에 떠올랐다. 그때라도 다시 몸을 돌리고 산을 오르면 되었다. 아직 발이 굳었을 뿐이니까. 돌이 된 발을 끌고 몇 걸음 더 오르던 여자가 다시 돌아본다, 이번엔 종아리까지 돌이 된다. … 거기서 돌아보지만 않으면. 하지만 기어이 얼굴을 돌린다. … 무엇을 보았기에? 무엇이 거기 있기에 계속 돌아보았나. (p.241)
재밌게도 인선은 돌이 된 것이 죽은 것은 아닐거라고 한다. 허물을 벗고 자유의 몸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가 건지고 싶었던 사람을 위해 잠수했을 것이라고 한다.
인선은 경하가 죽은 사람들을 위해 예술 작품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하자고 제안했을 때 흔쾌히 승낙했던 친구다.
경하가 중간에 타인의 고통을 마주하는 걸 포기했을 때도 인선은 꿋꿋히 그 작품을 준비하고 있었다.
인선또한 불합리한 학살의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인선의 부모님은 제주 4.3 사건 때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생존자다. 부모님 모두 살아남았음에도 살아있지 못했다. 어머니는 이불 밑에 매 번 쇠톱을 넣고 잤고, 치매에 걸린 후로는 무장군이 쳐들어올까 매번 공포에 질려했다.
엄마는 나를 죽어가는 동생이라고만 생각하지 않았어. 언니라고 믿을 때가 더 많았고, 어떨 때는 낯선 사람으로 여겼어. 자신을 구하러 온 모르는 어른. 무서운 악력으로 내 손목을 붙잡고 엄마는 말했어. 구해줍서. (p.312)
식탁 아래서 날 껴안고 있던 엄마가 내 이름을 정확히 불러 놀라기도 했어. 그때 태어나지도 않았던 나를 지키려고 엄마는 턱을 떨었어. (p.314)
인선은 경하의 손을 잡고 심연으로 내려가자고 말한다. 가서 이 심연 속을 사람들에게 알리자고, 그래서 다른 피해자들을 구하자고 말한다. 경하는 인선과 다른이들의 용기를 보며 끝내 부러진 마음을 되잡고 다시 심연을 마주보고자 일어선다.
숨을 들이마시고 나는 성냥을 그었다. 불붙지 않았다. 한번 더 내리치자 성냥개비가 꺾였다. 부러진 데를 더듬어 쥐고 다시 긋자 불꽃이 솟았다. 심장처럼. 고동치는 꽃봉오리처럼. 세상에서 가장 작은 새가 날개를 퍼덕인 것처럼. (p.325)
[총평]
한강 작가의 글을 좋아한다. 그의 글은 모든 것에 대한 연민이 담뿍 담겨있다. 약자를 가여히 여기는 태도. 상처받은 이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애정.
작가의 말을 보니 2014년 6월에 이 책의 첫 두 페이지를 쓰고 2018년 말에야 이어 썼다고 한다. 발행이 2021년이니 최소 3년에서 7년동안 조사한 것이다.
300쪽 짜리의 소설을 읽어도 마음이 아리고 안타까운데, 한 역사적 소설을 만들기 위해 몇 달, 몇 년이 넘게 실제 피해자의 자료를 찾아본 작가는 얼마나 감정이 힘들고 피하고 싶었을까?
이런 고통을 뛰어넘는 작가로서의 책임감과 집념이 불꽃처럼 강하게 느껴지는 책이었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목은 세상 모든 약자들이 받는 고통으로부터 시선을 돌리지 않겠다는 작가의 의지가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눈과 혀가 없는 사람들 위에. 장기와 근육이 썩어 사라진 사람들. 더이상 인간이 아닌 것들. 아니, 아직 인간인 것들 위에. 이제 닿은 건가, 숨막히는 정적 속에서 나는 생각했다. 더 깊게 입을 벌린 해연의 가장자리, 어떤 것도 발광하지 않는 해저면인가. (p. 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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