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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2024

클라우드 쿠쿠랜드(2023)

by 방황하는물고기 2024. 9. 22.
이 세상의 모든 사서에게 바치는 책



학창시절 의역으로 점철된 고전 문헌을 배우며, 몇글자 남지 않은 낡아빠진 종이 몇 장을 대단한걸 발견한 마냥 치켜세우는 뉴스를 보며, ‘이게 뭐라고?’ 라는 생각을 했다.
정보를 주는 것도 아니고, 시험에 나오는 것도 아니라면 고대의 문학을 굳이 읽을 필요가 있을까? 그 이야기들이 몇천-몇백년의 시간을 넘어 우리에게 구전되었다는 것 외에는 무슨 가치가 있는 걸까?

‘클라우드 쿠쿠랜드’ 읽을 가치가 있나요? 라는 질문이 문학의 가치가 물질로 증명돼야만 하는 현실 세태를 보여주는 듯 하다

<클라우드 쿠쿠랜드>는 한 이야기가 구전되기 위한 필사자와 운반자의 고통,
수 많은 역경 속에서 이야기 자체가 주는 힘을 800페이지로 묘사한다.

이 책을 읽고나면 고리타분해 보이던 <관동별곡>이, 시험에만 나오는 줄 알았던 <오디세우스>가 다르게 보인다.
고통을 잊기 위해, 흥미를 끌기 위해 나온 이 한 편의 이야기는 어떤 이들에게 살아가는 이유가 됐다.
릴스, 포르노, 도박 등 도파민의 홍수 속에서 사는 현대인들은 이해하기 힘들것이다. 문학속 이야기는 지난하고 때로는 괴롭다. 숏폼처럼 간단하지도 명료하지도 않다. 하지만 그 과정을 몰입했을때만 주어지는 상상력의 아드레날린은 다른 매체와 비교할 수가 없다.

문학이 현실세계에 주는 가치-이야기가 어떻게 순수한 재미로 인간에게 살아갈 이유를 주는지- 이 책보다 더 잘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책은 디오게네스가 쓴 가상의 책 <클라우드 쿠쿠랜드> 가 메인 소재이다. 고대의 책 한권은 700년의 시공간을 넘어 5명의 등장인물을 선형으로 잇는다.

필사본이 금기시되던 1400년대에는 이 책이 두 명의 소년 소녀에게 살아갈 희망이 되며,
냉전이 한참이던 1900년대에는 게이 소년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나서게 만들고,
지구온난화로 세계종말이 가까워진 2100년대에는 우주선에 갇힌 소녀가 자신의 아버지를 이해하고 가짜 세상을 도끼로 부수는 용기를 준다.

이 한 명 한 명의 등장인물 모두 <클라우드 쿠쿠랜드>라는 고전 문학이 없었다면 서로 이어지지도, 아니 살아남지도 못했을 것이다.
문학의 위대함을 다룬 문학을 읽으면서 다시금 문학의 가치를 깨닫게 됐다.(문중문 이랄까)

책을 읽으면서 정말 많이 울었다. 각 등장인물들이 각자의 고난 속에서도 -작가가 정말 캐릭터별로 상황 설정과 서사를 잘 짰다. 한 편 한 편이 독립되고 완전한 이야기다.-
자신의 소중한 이들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며 심장이 조각났다.
등장인물에게 감정이입하게 만드는 매체로 문학을 이길만한게 있나 싶다.

특히 그 사랑을 절절하게 느꼈던 구절들을 몇 개 적어본다.

"난 바보였어" 아버지의 손, 이마를 훔치는 그의 손이 뼈만 남은 것처럼 보인다.
.. "바보가 아름다운 건 포기할 줄 모르기 때문이라고 그러셨잖아요“
아버지는 그녀 쪽으로 고개를 기울이고 눈을 빠르게 깜빡이는데, 마치 눈앞에서 빠져나가는 생각의 속도가 너무 빨라서 미처 잡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할머니였어“ 그가 웅얼거린다. ”그 말을 해주신 건“ (p.390)


"짐승들이 좀 쉬어야겠습니다“ …오메이르는 바큇자국으로 엉망진창된 길을 기어올라간 후 나무 옆에 쭈그려 앉아 이름을 부르고, 소는 일어선다.
몰이 막대를 달빛의 어깨 사이 도드라진 곳에 갖다 대자 두 마리 소는 몸을 숙여 멍에 안으로 들어가고 다시 잡아끌기 시작한다.
(p.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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