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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2025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All The Names) (1997) 리뷰 ⭐️⭐️⭐️⭐️

by 방황하는물고기 2025. 12. 29.



[All The Names]
원제가 All The Names였다니. 한국어 초판에서는 <모든 이름들>로 발간되었다가 이후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로 바뀌었다. 대히트한 주제 사라마구의 전작 <눈 먼 자들의 도시>의 수혜를 입기위해서다. 아쉽다. 원제가 훨씬 더 작품의 주제를 잘 전달하는데. 문화적으로 호환되는 언어와 문장을 골라 의미를 전달하는 초월 번역이 아니고서야 작품명을 바꾸는건 작품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다. 저작인격권 침해다!

[이름 뒤에 사람 있어요]
국민의 출생, 결혼과 이혼, 사망기록을 관리하는 중앙등기소에서 일하는 사무보조원 주제가 주인공이다. 주제는 독신의 50살 남성이다. 할 일도, 만날 사람도 없는 외로운 삶이다. 그의 은밀한 취미는 유명인들의 등본을 몰래 복사한 후 집에 보관하는 거다. 그러던 중 실수로 평범한 30대 여성의 등본을 복사하게 된다. 이상하게도 그 여성은 운명처럼 느껴진다. 그 여성의 등본을 실수로 집은 것조차 계시인 것 같다. 주제는 여성의 신상을 조사하기 시작한다.
등본에서 찾아낸 주소를 통해 알음알음 그녀의 대모를 찾아 그녀가 졸업한 학교를 찾아간다. 추위에 덜덜 떨고, 생활기록부를 훔치기 위해 담을 넘느라 무릎이 찢겨 나가면서도 그녀를 알려는 그의 노력은 멈추지 않는다. 그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 등본 너머 실제 세계의 그녀를 아는 것이다. 그녀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던 중 주제는 그 사이 그녀가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허탈함도 잠시, 죽음의 원인을 알아야겠다는 사명감이 든다. 주제는 끝내 그녀가 매장된 묘지까지 찾아간다. 묘지는 그녀의 이름 대신 번호로 표시되어 있었다. 그녀의 번호가 기록된 묘지 앞에서 상념에 잠겨있을 때 나타난 양치기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려준다. 그가 멋대로 사람들의 묘지 번호를 뒤바꾸고 있다는 것이다. 주제는 울컥 화를 낸다.

사람들이 이곳에서 가족과 친구를 그리며 찾아오고, 기도하고 묵상하며, 사랑했던 사람들을 위해 꽃을 꽂거나 울기도 하는데, 한 양치기의 악의 섞인 장난으로 서로 이름이 바뀐다면, 그래서 존경받는 수많은 죽음들이 실제의 그들이 아니라면, 그 죽음은 정말 우스운 일이 될 겁니다. (p.252)


사람은 이름으로, 이름은 번호로 대체된다. 효율적이고 구체화된 텍스트 뒤에 본질적이고 손에 잡힐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잊고는 한다. 작가는 19년간 공산당 활동에 전념한 이력이 있어 비인간화의 폐해를 더 느끼지 않았을까. 호치민은 미군을 격퇴하기 위해 베트콩 몇백만명을 죽음으로 내몰고 이런 말을 했다. ’당신들이 우리 한 명을 죽일 때마다 우리는 당신들 열 명을 죽일 것이다.결국 지는 쪽은 당신들이다.‘ 호치민은 종내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죽음은 되돌릴 수가 없다. 몇백만명, 이라고 적은 이 네 글자 뒤에는 수 천만, 수 억의 이야기와 눈물과 사랑이 있다. 인명은 소모품이 아니다. 인간은 하나의 세계이며 이야기이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의 위엄]
주제를 전달하기 위한 기법이 영리하고 복잡하다. 이게 무슨 내용이지? 라고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머리를 띵 치는 주제가 뚜렷이 드러난다.

주제 사라마구는 이야기의 재미를 위해 대비와 배경적 장치를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이름밖에 없는 등기와 사진이 부착된 학생기록부. 유명인과 무명인. 소장과 보조서기관.
주제가 근무하는 등기소는 컴퓨터가 아닌 종이에 모든 기록을 한다. 산처럼 쌓인 서류 더미는 말 그대로 이름을 사방에 흩뿌려놓는다. 하지만 그것들은 알맹이가 없는 잉크 자국일뿐이다.

‘등기소에서는 우리가 누군지조차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거죠. 그들에게 우리는 몇 개의 글자로 된 이름과 날짜 외엔 아무것도 아니라는 얘깁니다.’ (p.207)


배경이 되는 등기소는 공무원의 일탈을 절대 용서치 않는 위계질서를 가지고 있다. 엄청난 위압감을 보이는 등기소 소장은 주제의 수상쩍은 행동을 유심히 관찰한다. 소장은 직위와 맞지 않게 주제를 챙겨주고 그의 편의를 봐준다. 주제가 한밤 중 은밀히 등기소에 잡입할 때는 누군가 지켜보는 연출을 넣는다. 소장은 악역일까 아군일까? 둘의 미스터리한 관계는 작품에 스릴러를 더한다.

마지막에 주제가 제멋대로 꽂힌 묘지판들을 다시 뒤섞는 장면이 인상 깊다. 인간을 사물로 바라보는 세상에서의 작은 반항이다. 이 행동이 씨앗이 되어 다시 인간의 본질을 찾을 수 있을거라는 희망이 느껴진다.

그는 그 미지의 여자의 무덤 앞에 꽂힌 번호판을 뽑아 조금 전의 새 무덤에 꽂았다. 바꿔치기는 끝났다. 진실이 거짓으로 바뀐 것이다. … 그렇게 된다면 다시 진실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 주제씨는 집으로 돌아갔다. 오늘 길에 빵집에 들렸다. 토스트와 우유를 탄 커피 한 잔을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