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뇌는 모호함을 싫어한다]
갑자기 책상 위에 사과가 나타났다고 쳐보자. 당신은 소스라치게 놀랄 것인가?
아니다. 내가 어제 먹다 냅뒀겠거니, 가족 중 누군가가 가져다 뒀겠거니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아할 것이다.
그 사과가 책상 위에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눈치채지도 못하는 찰나에 만들어진다. 우리의 뇌는 모호함을 혐오하고 확실성을 추구한다. 이상한 건 자체적으로 상상력을 가동하여 말이 되게 만든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은 까먹거나 신경을 안 기울였던 수많은 것들에 매번 어리둥절해하고 당황하며 살아가는 편집증 집단일 것이다.
[사람도 이해의 대상이다]
뇌는 타인도 완벽하게 이해하고 싶어한다. 나는 특히 더 그렇다. 신경이 쓰이는 사람일수록 그 사람의 말 한 마디 한 마디, 행동 하나하나를 복기하고 의미를 찾는다.

첫째로, 내 마음의 평안을 위해서다. 그 남자가 알 수 없게 군다면 그건 걔가 ENTP이라 그런거다. 음, ENTP는 어떻게 행동해야 좋아할까? 해설지를 보며 하나씩 되짚어간다. ENTP에게 연락을 바라지 말 것. 다음에는 이걸 조심해야겠다. 마음이 편안해진다.
둘째로, 그 사람에게 공감하기 위해서다. 영어로 ‘walk(s) on someone’s shoes’라는 표현이 있다. 남 일에 공감하는 것은 어렵다. 그 사람의 신발을 신어보듯 상상해보는 수밖에 없다. 상상은 이야기가 있어야 단단해지기에 그 사람에게 이런저런 걸 물어보게 된다. 이런 스토리가 있다면 걔가 그렇게 싸가지가 없는 것도 납득이 된다.
[하지만,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사람의 마음이 단순하게 설명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수학 문제처럼 해결법이 있다면, MBTI 16종류로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면. ‘인간의 모든 고통과 후회, 집착과 슬픔과 나약함 들을 참과 거짓의 성근 그물코 사이로 빠져나가게 한 뒤 사금 한줌 같은 명제를 건져올리는 논증의 과정에는 늘 위태하고 석연찮은 데가 있기 마련(p.44)’이다.
작품으로 돌아가보자. 희랍어 시간은 갑자기 실어증이 발현된 여자가 이를 극복하기 위해 희랍어 학원을 다니며 시작된다.
여자 주인공의 심리치료사는 그녀의 실어증이 발현된 원인을 육친의 죽음과 아이 양육권의 상실에서 찾는다. 그러나 주인공은 심리상담가의 해석을 부정한다. 이 장면은 작중에 두 번이나 나온다.
반백의 심리치료사는 그토록 자명한 원인들을 왜 그녀가 부인하려 하는지 납득하지 못했다. 아니요. 그녀는 테이블에 놓인 백지에 적었다.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요. (P.13)
가장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그녀를 이해한다는 그의 말이었다.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담담하게 알았다. 모든 것을 묵묵히 수습하는 침묵이 두 사람을 둘러싼 채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요. 그녀는 펜을 집어, 탁자에 놓인 백지에 반듯한 글씨로 적었다.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요. (p.55)
주인공의 어머니는 임신 중 낙태를 고려한 적이 있었다. 그 사실을 심리치료사에게 말하니 심리치료사는 ‘자신의 존재가 사라져버릴 것 같은 위협감을 느꼈던 것이나, 이제 당신은 훌륭히 자랐으며 힘을 가지게 되었다고, … 목소리를 크게 해도 괜찮다고, 충분히 공간을 점유하고 어깨를 곧게 펴라고(p.54)’ 라는 조언을 한다. 하지만 ’그 명석하고 아름다운 결론의 어딘가가 그녀를 불편하게 했다. 여전히 그녀는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싶지 않았고, … 본성의 자연스러움을 억누르며 지내왔다고도 생각되지 않았다. (p.54)’
하물며 가족간에도 이해는 힘들다. 작중의 남자주인공은 소프라노인 여동생이 본인의 실력을 탓하고 자책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한다. ‘네 목소리론 네 얼굴을 만져줄 수 없는 모양이구나. 그러면 무엇이 너를 만져줄까. 아마 나는 절망을 느꼈던 것 같아. (p.80) 이는 그가 독일에 사는 어머니와 여동생을 냅두고 홀로 한국행을 택할 때 여동생이 느끼는 바와 같다. ‘오빠를 이해할 수 없어. 라고 너는 말했지. 나는 오빠가, 우리를 사랑한다고 생각했는데. (p.80)’
[불완전한 이해가 주는 위로]
남자는 어느 날 건물에 갇힌 새를 밖으로 내보내주려다가 시력 보정 안경을 부숴트린다. 오른손에 부상을 입은 채 우왕자왕하는 남자를 여자는 부축해준다. 병원에 들렀다기 남자의 방까지 데려다주게 된다. 남자는 어둠 속에서 그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하고, 여자는 듣는다. 남자는 주저하다가 묻는다. ’그러니까, 당신은 처음부터… 처음부터 말을 하지 않았나요? (p.163)’ 이 질문은 노골적이다. 그녀의 장애를 단도직입적으로 언급한다. 하지만 그 질문이 밉지 않다. 그가 그녀를 얼마나 이해하고 싶은지 그 마음이 전해진다. ‘…당신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가요?’ ‘….희랍어는 왜 배우는 건가요?’ ‘… 그날, 희랍어로 공책에 쓴 건 뭐였나요?’ (p.164-165)
그의 질문들은 그녀의 마음속 생각들을 끄집어낸다. ‘미끄러지며 긋고 찌르는 말들, 쇳냄새가 나는 말들이 그녀의 입속에 가득 찼다. 조각난 면도날처럼 우수수 뱉어지기 전에, 막 뱉으려 하는 자신을 먼저 찔렀다.(p.165)’ 그렇게 그는 그녀를, 그녀는 그를 이해한다. 그 이해가 불완전하고 순간적인 것이 될지라도 말이다.
중요한 건 상대를 완전히 이해하려는 생각을 버리는 것이다. 나는 책을 이해하기 위해 독후감을 쓴다. 그렇게 해서 그 책을 내 마음에 새기고자 한다.
같은 책이라도 내가 지금 작성한 독후감과 미래에 작성할 독후감은 다를 것이다. 몇 백 페이지의 소설도 완전히 이해하기가 불가한데 하물며 사람이란 어떨까.
명료한 원인과 결론은 아름답다. 하지만 진리가 아니다. 사람을 어떤 틀에 넣어 소화하기 좋게 만드는 건 내 오만이다.
선천적으로 시력이 나빠 종래에는 눈이 완전히 멀 수밖에 없는 남자주인공을 두고 여동생은 어릴적 비닐봉지를 뒤집어 쓴채 ‘이정도면 나쁘지않네!’라고 철없이 외친다. 그 모습을 어머니는 싫어했지만, 그는 그녀 나름대로 ‘오빠의 먼 미래가, 생각만큼 끔직하지 않을 거라는 걸 막 깨달은 것임을, 그걸 이해하기엔 어머니가 너무 진지했음을(p.146)’ 느낀다.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위로가 된다. 단순하고 명확한 결론과 재단이 상처가 될뿐이다. 모호함을 사랑하게 만드는 작품의 한 구절을 써놓는다.
넌 철학을 하기에 너무 문학적이야, 라고 너는 이따금 나에게 충고했지. 네가 사유를 통해 다다르고자 하는 곳은 일종의 문학적 고양상태일 뿐이지 않니, 라고.
….
하지만 나는 어김없이 그 세계의 것들에 매혹되었지. 이를테면 아리스토텔레스를 강의하던 선생이 잠재태에 대해 설명하며 ‘앞으로 내 머리는 하얗게 셀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죠. 지금 눈이 내리고 있지 않지만, 겨울이 되면 적어도 한번 눈이 올 것입니다.’ 라고 말했을 떄 내가 감동한 것은, 오직 그 중첩된 이미지의 아름다움 때문이었어. (p.117)
[새삼 느낀다. 한강 사랑해요]

한강 너무 좋다. 작가는 세상을 연민과 애틋함으로 바라본다. 그 수준이 인간이 아니라 인간계를 초월한자의 느낌이다. 이 세상의 존재들이 너무 가엾고 사랑스러우면서 무상해서, 내 마음이 너무 아픈데도 꿋꿋히 바라보는 그 굳은 결의가 느껴진다. 이 위대한 작가의 작품을 한 방울의 불순물도 들어가지도 않는 원문의 언어로 온전히 느낄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큰 축복인가.
이 책은 2년간 썼다고 한다. 고작 190페이지의 짧은 소설을 만들기 위해 2년의 시간을 투자했다. 그만큼 작품 안에 있는 작가의 생각들은 깊고 농축돼있다. 정말…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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