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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2024

타인의 해석(2020)

by 방황하는물고기 2024. 5. 19.
원제: Talking To Strangers


‘세상은 이야기로 이루어졌다’라는 책에서 짧게 언급한 문장이 있다. 인간은 거짓을 간파하도록 설계되지 않았다. 타인을 의심하는 것보다 믿는 것이 생존에 큰 이점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타인의 해석’은 이 한 문장에서 출발하는 수많은 인간의 실수와 오류를 다룬다.

[진실 기본값 이론의 딜레마]
2007-2011년 심리학자 러바인은 실험을 기획한다. 피실험자들이 컨닝을 하게끔 시험 환경을 유도한 뒤, 시험이 끝난 후 그들에게 컨닝을 했냐고 추궁하고 그 반응을 기록한다. 이후 피실험자들의 영상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거짓말을 하는 사람과 진실을 말하는 사람을 구분해보라고 한다. 평균적으로 약 54%의 적중률을 보였다. 얼핏 들으면 진실을 말하는 사람 중에 반, 거짓을 말하는 사람 중에 반을 맞춘 것처럼 들린다. 평균의 함정에 빠지지 말자. 상대방이 진실을 말하는 경우의 적중률이 높았고, 거짓말할 경우는 적중률은 낮았다. 우리는 진실을 기본값으로 갖고 있다. 우리는 타인이 정직하다고 가정한다.
안나 몬타스라는 쿠바의 스파이가 그래서 미국 정보보안국에서 17년동안 일할 수 있었다.

인간의 당연한 기본값을 넘어서 낯선 사람을 항상 의심하면 어떨까?
버나드 메이도프의 폰지 사기를 밝힌 해리 마코폴로스가 그 대표적인 예시이다.
그는 2000년부터 8년간 메이도프의 사업이 사기임을 고발하고 다녔지만, 공식적인 피해자가 나오기 전까지는 아무도 그에게 귀를 기울여주지 않았다.
그는 강박적으로 계산하며 모든 것을 의심했고, 따라서 거짓말을 간파할 수 있었다. 메이도프가 자수한 이후 자신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총을 소지하고 다녔다. 단편적인 일화만 봐도 피곤한 삶을 살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사회 부적응자면서 진실에 꿰뚫어보는 일면 바보 성자를 러시아 민담에서는 유로지비(yurodivy)라 한다.

출처: http://www.kidsfree.co.kr/bbs/board.php?bo_table=menu055&wr_id=1365062127&sca=Book6


바보 성자는 기만의 가능성에 대해 다른 감각을 갖고 있다. 그들은 사기와 기만을 폭로하기 위해 조직에 대한 층성, 동료들의 지지를 기꺼이 포기한다.

진실기본값과 거짓말의 위험 사이의 상충 관계는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하다. 이따금 거짓말에 취약해지는 대가로 우리가 얻는 것은 효율적 의사소통과 사회적 합의다. 이득은 대단히 크고 그에 비해 비용은 사소하다. 물론 우리는 가끔 기만을 당한다. 이는 일처리의 비용일 뿐이다. (133쪽)


마코폴로스는 거대한 거짓을 밝힌 특별한 예외적 개인이며, 이런 유로지비가 사회에 섞여서 살기는 쉽지 않다. 진실기본값은 인간의 본능이다.
여기에 더불어 타인을 해석하는 데 어려움을 더해주는 사항이 하나 더 있다. 모든 거짓말쟁이가 거짓말쟁이처럼 행동하진 않으며, 모든 정직한 사람이 자신만만하지도 않다는 사실이다.

[투명성이라는 신화]


TV 쇼 등장인물들의 반응은 투명하다. 놀랄때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떡 벌리며, 화날 때는 미간을 찌푸리고 입꼬리가 축 내려가 있다. 세상이 프렌즈와 같다면 사람을 파악하기 얼마나 쉬울까. 태도는 사람을 보여주는 창이 아니라고 작가는 주장한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이다.

하버드의 경제학자와 컴퓨터과학자, 보석 전문가가 2008~2013년동안 뉴욕에서 공소 사실 심문에 출두한 피의자 약 55만명의 기록을 취합했다. 그 가운데 뉴욕의 판사들이 석방한 수는 40만명이 약간 넘었다. 그들이 제작한 인공지능도 판사와 같은 정보(피의자의 연령과 전과기록)를 가지고 40만명의 석방 리스트를 추출했다. 컴퓨터가 뽑은 명단에 있는 사람들은 판사들이 석방한 사람보다 재판을 저지르는 중에 범죄를 저지를 확률이 25%나 낮았다. 판사는 피의자를 보고 선고를 내리기를 바란다. 그 과정을 인간적으로 만들기 위해서다. 한 사람을 구금하는 결정을 쉽게 내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인간적 요건은 우리가 엄청난 양의 오류를 용인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것이 낯선이에게 말 걸기의 역설이다. 누구를 믿고 누구를 믿지 말아야 할지 혼란스러워진다. 게임이론처럼 모두를 의심하는게 최선의 선택인걸까?

[훈련받은 대로 하라]
여기 모두를 의심하는 경찰관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브라이언 앤서니아이다. 그는 2015년 한 흑인 여성 샌드라 블랜드를 불심 검문하고 그의 불응적인 태도에 체포까지 강행한다. 그리고 샌드라는 구금 중 자살한다.
작가는 이를 나쁜 경찰관과 기분이 나빴던 흑인 여성 사이에서 일어난 문제로 보지 않는다. 더 큰 시스템을 보라고 촉구한다.

1991년 캔자스시티의 144구역에서는 총기 범죄가 절반으로 감소했다. 갖은 노력을 했음에도 줄어들지 않았던 범죄율을 감소시킨 비법은 바로 적극적인 불심 차량 검문이었다. 이 정책은 전국 각지로 금세 퍼져나갔고 어느새 경찰 처세의 지침이 되었다. 얼마나 많은 총기를 회수했는지가 일을 열심히 했느냐를 판단하는 척도가 되었다.

앤서니아는 위 철칙을 지키며 한적한 교외 마을의 한낮에 블랜드를 불러 세웠다. 기존의 통념으로 보면 그는 경찰로서 해야할 일을 한 것이다. 하지만 캔자스시티의 케이스를 일반화하기는 어렵다. 이 실험은 범죄율이 높은 지역, 높은 시간에 한해 시행했다. 다른 경우에 따른 수많은 위양성 케이스는 검거율이라는 수치에 가려 흐려졌다.

낯선 사람에 대해 우리가 저지르는 실수의 밑바탕에 존재하는 관념, 그리고 그 관념을 중심으로 우리가 구축하는 제도와 실천에 대해 알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개인적인 것이다.

타인을 신뢰하는 우리의 본성을 모독하는 대신에, 서로를 신뢰하는 것이 죄가 되지 않도록 하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그것이 이 책이 제시하는 바이다.

[개인적인 감상]
도덕적인 판단을 배제한, 어떻게 보면 과도하게 중립적인 주장들이 부담스럽고 받아들이기 어렵기도 했다. 너가 존경했던 사람을 믿지 마라. 성범죄를 막기위해 피해자도 술을 멀리해라. 기억이 혼란스러운 피해자의 주장을 사실이라고 믿어서는 안된다. 이 책의 편집자의 말을 빌리자면 third rail(전차에 전기를 공급하게 세운 레일, 전기가 흘러 손에 닿으면 위험하다. 논쟁적인 주장을 일컬음)들이다. 하지만 내가 평소에 당연하다고 믿던 것을 흔드는 이런 주장들이 내 사고를 더 넓히고 비판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