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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2023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2022) 리뷰 ⭐️⭐️⭐️⭐️⭐️

by 방황하는물고기 2025. 12. 19.

 

내 삶에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닫게 되는 순간은 절망스럽다.  광활한 우주 속 한낱 먼지에 불과한 사실을 느끼는 순간 모든 것이 의미없이 느껴진다. 잔혹한 감각에 우리는 모든 것을 내팽겨쳐 버리기도 하고, 순간의 자극에 몸을 맡겨 하루하루를 버티기도 하고, 장기적인 목표를 만들어 미래를 꾸역꾸역 살아내기도 한다. 그럼에도 궁극적으로 내 삶에 부여된 의미란 없다. 나는 왜 사는걸까? 그저 태어났기 때문에?


이 책은 '존재 이유'라는 기초적인 철학 문제에 대한 답을 풀어낸다. 혹자는 이 책의 장르를 말하기 어려워한다. 그만큼 교묘하고 매혹적으로 작가의 의견을 풀어나가기 때문이다. 어떤 과학자의 전기와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적절히 뒤섞은 철학 에세이다.


작가가 조명한 과학자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다. 그는 일평생을 어류 분류학에 바쳤다. 생선의 종류를 분류하고 새로운 생선의 종을 발굴해내는 삶을 살았다. 지진이 그가 분류해온 수백개의 표본을 파괴했을 때도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표본에 이름표를 직접 바느질하며 의지를 다졌다. 왜 사는지 이유를 알 수 없어 방황하며 우울해하던 작가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굳은 심지에 반했다.
"운명의 형태를 만드는 건 사람의 의지다".

 

의지는 아름답기만 하지 않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자신의 가치관에 집어 삼켜져 살인 교사를 한다. 분류학의 정통을 잇는 우생학을 열렬히 지지하기도 했다. 삶의 의미를 자신의 의지로 채우기 위해 그는 주기적으로 오만과 고집을 복용해야만 했다. 
그는 정상인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저능아들을 정부가 판단하여 낙태시킬 수 있는 법안을 통과시키는 데 사력을 다했고, 해냈다. 우월성에 따른 분류가 있다고 믿은 그의 의지의 승리인 것일까.

 

하지만 생태계에서 우월한 것은 없다. 남조세균은 바다에 사는 작은 초록 점 같은 세균이다. 너무나 하찮게 보여 수 세기동안 이름조차 없었다. 하지만 1980년대, 우리가 호흡하는 산소의 상당량을 이 세균이 생성한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지금은 이 세균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생명이란 이토록 복잡하다. 다른 생명체들과 엮인 사슬에서 누군가와는 가치가 있기도 하고, 누군가와는 가치를 잃기도 한다. "민들레 원칙"이라고 한다.

 

물고기는 분류학적인 관점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생물들 사이의 공통점을 두고 보자면, 페어와 연어보다 연어와 소가 더 많은 공통점을 지닌다. 물고기는 다만 그들의 서식지를 두고 뭉쳐서 부르는 것 뿐이다. 과학 교과서에 한 줄 정도 등장할 것 같은 이 문장이 책에서는 충격적인 반전으로 그려진다. 데이비드가 한평생을 바친 영역이 사실은 미신의 과학이었다. 편견과 고집, 다른 말로는 전념과 몰입으로 뭉친 데이비드는 이 말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 삶의 이유가 없다는 것과 같았을 것이다.


'별이나 무한의 관점, 완벽함에 대한 우생학적 비전의 관점에서는 한 사람의 생명이 중요하게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수많은 관점 중 단 하나의 관점일 뿐이다."

 

'어머니를 대신해 주는 존재, 웃음의 원천, 한 사람이 가장 어두운 시간에서 살아남게 해주는 이유'


우리는 물고기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일평생을 바친 어류 분류학자처럼 인생을 살아간다. 물고기가 없다고 해서 우리 눈 앞에 있는 생명체들이 없어지는 게 아니다. 그들을 어떤 관점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차이가 생길 뿐이다.

우리는 하던 것들을 포기하더라도 다른 관점으로 물고기에 접근해야 한다. 우주가 나에게 부여한 의미는 없지만, 다른 이들과의 관계에서는 분명한 의미가 있다. 가족, 친구, 동료와의 관계에서 나와 상대방은 서로를 그물망처럼 지탱해주고 있다. 이 책은 그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아름다운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