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2026

죽음의 역사 (2022) 책 리뷰 ⭐️⭐️⭐️.⭐️

방황하는물고기 2026. 3. 13. 00:40



[죽음을 극복하는 여정]
인간은 유한하다. 언젠간 죽을 수밖에 없다. 부제인 ‘죽음은 어떻게 우리의 세상을 변화시켰는가?’를 보고 죽음이라는 개념이 우리의 사고관에 미친 영향을 설명하는 심리/철학책인 줄 알았다. 하지만 과학 커뮤니케이션 책에 더 가까웠다. 시대별 주요 사망 원인은 네 가지 카테고리로 나뉜다. 전염병, 음식, 유전, 나쁜 행동이다. 이 책은 각 카테고리별 대표적인 케이스가 탄생한 배경과 인간의 극복 과정을 설명한다. 비단 의학적인 얘기뿐만 아니라 정치, 통계, 역사, 심리 등 다양한 분야를 막론하고 죽음의 키워드로 인류를 설명하고 있다. 좋은 책이다.

[통계의 힘]
보험계리사였던 존 그랜트는 처음으로 기대수명 계산에 사망자 통계표 자료를 이용했다. 17세기에는 인구를 집계하는 기술이 없었다. 도시는 시민이 몇 명인지 모른채 운영됐다. 존 그랜트는 나이대별 사망률을 계산하기 위해 매년 출생자 수로 가구 수를 역산해 실제와 유사한 인구 수를 도출했다. 존 그랜트의 논리적 추정법과 집요함 덕분에 인간의 기대 수명을 확실히 알 수 있게 됐다. 그 전까지는 대략적으로 이 때쯤이면 죽겠지… 라는 감은 있었어도 확신은 없었을 것이다. 숫자도 언어다. 내 기대 수명이 17세라는 걸 알았을 때의 충격은 인간을 더 죽음과의 투쟁에 불타오르게 했을 것이다.

위생 관념이 없던 과거에는 전염병이 더욱 위험했다. 1800년대의 대표적인 사례는 콜레라다. 콜레라는 그 원인을 특정할 수 없어 예방에 어려움을 겪었다. 영국의 의사 스노우는 지도에 콜레라 사망자 수를 색으로 표시하였다. 시각화의 시초다. 통계를 보자 유독 우물 근처에서 사망자가 많았다. 그는 수질원을 통해 질병이 전파된다는 가설을 가지고 정부를 설득했고, 펌프를 폐쇄하자 전염병을 막을 수 있었다. 서로 다른 집단이 어떻게, 왜 질병에 걸리게 됐는지 연구하는 역학의 탄생이었다. 데이터 분석이 없었다면 다른 사람들처럼 공기로 콜레라가 전염된다는 생각을 의심없이 믿었을 거다.

[질병 치료에서도 혁신과 배짱이 중요했다]
돌이켜보면 당연해 보이는 작은 발견이 사건을 푸는 열쇠일 때가 많다. 보통 그런 발견은 혁신적인 생각에서 온다. 질병을 해결하는 데서도 혁신과 배짱이 필요할 거라는 생각은 못했다. 뭔가 사업에 어울리는 키워드가 아닌가? 막연히 의료계 종사자들은 규격화된 연구와 실험-임상 실험-을 통해 치료제를 개발한다는 생각만 있었다. 놀랍게도 내가 당연하게 떠올린 임상 시험법도 1700년대 중반에 개발됐다. 대조군과 실험군을 나눠 변수를 최대한 통제하는 실험 기법은 그 전에 없었다. 괴혈병을 치료하기 위해 다양한 치료 기법을 도입해보다가 나온 아이디어다. 오렌지와 레몬을 배급한 집단에서 괴혈병 발병 확률이 낮았다는 사실을 확인한 의사 제임스 린드조차도 의심에 압도돼 기존의 전통을 벗어나지 못했다. 린드는 레몬즙이 효과가 있다는 확실한 결론을 전달하는 대신 여러 치료법을 제안하면서 그의 논문을 마무리했다. (p.224)

한 가지의 예시를 더 들어본다. 과거에는 의사들이 고름과 피가 묻은 의료 기기와 옷을 입고 병동을 돌아다녔다. 청결을 관리하는 것은 유별난 행동이었다. 의사는 환자에게 어떤 방식으로도 피해를 줄 수 없었다. 세균을 통해 질병이 유래된다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헝가리 의사 제멜바이스는 산욕열을 방지하기 위해 동료 의사들에게 의사의 청결을 촉구했으나 따돌림을 당해 직업을 잃고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p.150) 작은 벌레가 인간을 죽일 수 없다고 생각하고, 세균에 감염되면 질병이 생긴다고 의심하지 않았다. 과거에는 물리적인 크기에 진실이 호도됐다. 권위와 통념을 의심하자. 확실한 가설을 세우고 검증하자.

[대의를 위한 희생은 당연한가?]
천연두는 제너 박사가 1790년 우두를 이용한 백신을 개발하면서 퇴치됐다. 직접 천연두를 주사하는 건 사망율과 위험성이 높았다. 반면 우두 주사는 부작용이 덜하지만 천연두 예방 효과는 같았다. 제너는 우유를 짜는 농민 여자 중 손에 물집이 잡히면 천연두에는 안 걸린다는 미신을 유의깊게 들었다. 우두에 걸린 소를 만진 사람은 천연두에 안 걸린다는 걸 밝혔다. 하지만 냉장 보관 기술이 없던 과거에 백신을 손상시키지 않고 장거리를 옮기기는 힘들었다. 이에 사람들은 고아들의 몸을 매개로 우두를 중남미로 날랐다. 식민지의 사망률을 낮추기 위해서다. 비윤리적이고 잔인한 일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을 살린 건 사실이다. 어떻게 보면 대의를 위한 희생이다.

지금 고아를 이용해서 백신을 나르자고 하면 인류의 반은 반대를 하리라 믿는다. 아이러니하게도 동물들은 고아의 역할을 계속하고 있다. 토끼와 쥐를 비롯한 다양한 동물들이 인간을 살리기 위해 희생되고 있다. 전 직장 동료는 쥐를 대상으로 실험하는 게 힘들어서 IT 업계에 들어왔다고 했다. 그건 되고 이건 안 되는 경우 대부분은 이것도 안되는 게 맞다. 우린 그저 눈가리고 아웅을 하고 있다.

[인간의 본성이란]
인간의 주요 사망 원인 중 네 번째 카테고리는 그 분류부터 재밌었다. ‘나쁜 행동’이다. 인간이 자초한 죽음이라는 거다. 기원전 1700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3700년도 더 전에 쓰여진 함부라비 법전은 현재의 법과 놀랍도록 유사하다. 신분제를 빼면 현대인이 대부분의 큰 틀에 공감할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p.317) 국가와 정부가 탄생함으로서 우리는 자유를 빼앗긴 대신 평화와 안전을 찾을 수 있었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사태에서는 본능에 의존한 유혈 사태가 벌어질 것이다.

나쁜 행동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담배다. 담배는 1500년 미국 원주민에게서 받아온 신 문물이다. 1906년까지도 담배가 건강에 좋다고 명시됐다. 사람들은 담배가 해로운 줄 모른 채 소비했다. 아메리칸 토마코의 창시자인 듀크는 대량 생산 기술을 통해 ‘더 위생적인’, ‘의사가 고른’ 담배라는 브랜딩으로 담배의 대중화를 이끌었다. 듀크 대학의 사실상 창시자이기도 하다. 세계를 담배에 중독시킨 듀크도 담배의 치명성을 몰랐다. (p. 357) 지금은 모두가 담배가 해로운 걸 알지만 끊지 못한다. 중독됐기 때문이다. 정부도 담배가 인구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거라는 걸 알았다면 대량 확산을 용인했을까? 지금 많은 정부들이 금연 캠페인을 벌이는 걸 보면 아닐 것 같다. 새삼 숏폼 등 도파민을 자극하는 중독적인 콘텐츠가 더 위험하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본능을 건드리는 제품을 의지로 막는 건 힘들다.

[죽음을 극복한 인간은 행복할까?]
책 뒷표지의 서평에서 책이 희망적이란 말이 많았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다. 인간은 어떻게든 질병에 대한 은탄환을 찾아냈더라. 물론 아직 극복하지 못한 질병은 많다. 항상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까란 의구심이 든다. 어쩌면 인간의 오만함이 아닐까?

가장 가능성이 높은 질병 극복 방법은 유전자 개조 인간이다. 모든 질병과 고통을 다 도려내고 탄생시킨 완벽한 불멸의 인간은 행복할까? 질병으로 고통받느니 아예 질병이 없는 존재로 태어나는 게 낫지 않은가? 사실 완벽한 인간을 탄생시키는 건 합리적이다. 질병 치료를 위해 희생되는 동물들도 줄어들 것이다. 우리는 자연을 역행한다는 죄책감으로 당연하고 합리적인 버튼을 못 누르고 있는 거 아닐까? 온 국민의 뇌가 통에 절여져 행복한 꿈을 꾸는 세계는 디스토피아가 아닌 유토피아인 건 아닐까? 이런저런 존재론적 고민이 떠오른다. 주제 사라마구의 ‘죽음의 중지’를 보고 뭔가 깨달으면 재밌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