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1992)⭐️⭐️⭐️⭐️

[왜 강민주인가]
작가 양귀자는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를 말한다. 여든 넘은 할머니가 꾸역꾸역 그를 찾아와 지지리도 박복한 내 인생을 풀어달라고 하소연한다. 작가는 문득 깨닫는다. 글로라도 한을 삭혀야 하는 숨막히는 삶을 살아간 사람들은 대부분 여성이며 그들을 벼랑으로 몬 사람들은 한결같이 남성이다.
주인공 강민주는 그들을 대변하여 태어났다. 폭력적인 아버지를 벗어나 그를 키우고 지키기 위해 바닥부터 부를 일궈낸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오만하다. 본인은 평범한 사람과 다르다고 믿는다. 본인은 신의 대리자이다. 억압받는 여성을 해방하고 남성을 짓눌러야 하는 사명을 지녔다. 이런 자신만만한 태도가 통쾌하기도 하다.
하지만 독자는 자연스럽게 깨닫는다. 강민주는 한낱 인간이다. 미성숙하고 인정받고 싶은 어린애다. 뛰어난 내 모습을 알아봐달라는 어리광을 대놓고 부리기도 한다.
약간의 오해가 있을까 봐서 굳이 밝힙니다만 저는 세상에 태어난 지 서른 해가 조금 못 되는 미혼여성입니다. ... 그밖에는 아무 내세울 것고 없고 주눅들 것도 없는 보통의 여성입니다. (P.229)
현실이 얼마나 가혹하면 이렇게 어린 사회 초년생 여성에게 가부장제의 타파를 맡겨야 하는 걸까. 강민주가 누군가를 믿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그가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가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양귀자는 강민주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그의 유약함과 허세를 문득문득 드러내며 우리에게 말한다. ‘정말 아이까지 나서게 해야겠어?’
[여성의 아름다움은 중요치 않기를]
백승하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묘사하는데는 지면을 아끼지 않는데 반해 주인공의 외모에 대한 언급은 의도적으로 사린다.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여성해방을 외치는 주인공이 외적인 아름다움으로 사건을 주도한다면 또 다른 여성의 잣대를 만들 것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강민주에게는 세 명의 남성이 얽혀든다. 백승하, 남기, 김인수. 백승하와 남기에게는 강민주에게 끌려들만한 이유가 스토리적으로 있다. 단순히 예뻐서 폴인럽이 아니다. 김인수는 외모때문에 반했지만 강민주의 계획 실패는 그의 끈질긴 구애에서 비롯됐기에 오히려 아름다움에 대한 비판에 가깝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것이오]
“그렇소. 인정하오. 하지만 요즘은 많이 달라진 것도 사실 아니오? 예를 들면 최근의 핵가족 형태에서는 여성들이 경제권을 쥐고 가정을 주도하는 것을 많이 보았소. 우리 남자들은 그동안 많이 양보했다고 보는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것이오? 남자들이 지난날 처럼 일방적으로 횡포를 부릴 수 없게 법적인 장치도 상당히 바뀌었다고 알고 있소만."
"달라졌지요. 물론. 그러나 아직도 근본적인 평등과는 거리가 멀어요. 그리고 여자들이 쥐고 있는 것은 경제권이 아니라 소비권 정도겠지요. 법적인 장치도 확실히 예전에 비하면 나아진 것은 사실이에요. 하지만 법은 인간의 정서를 일일이 반영할 수 없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어요. 여자와 남자의 문제만큼 심정적인 것이 또 있을까요? 사회의 지배제도가 남자에게 유리하게 통용되는 한은 어떤 완벽한 법도 여자들의 고통을 보상해줄 수 없어요."
"그렇다고 세상의 모든 남자를 사라지게 할 수는 없지 않겠소? 그것은 여자들도 원하는 바가 아닐 것이오." 백승하도 결국 논리보다는 감정으로 돌아온다. (P.220)
책을 읽으면서 강민주보다는 백승하가 이해될 때가 많았다. 강민주는 극단적인 사회 전복주의자고, 백승하는 이상적이고 합리적인 남성상이니까. 나도 현실과 타협하고 늙었다. 열등감은 가끔씩 꿈틀거려도 예전만큼의 분노는 없다.
하지만 위에 대화만큼에서는 강민주를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23년 전 소설인데도 현재의 페미니즘 논쟁과 논조가 같다. 극단적인 주장을 취하면 반대쪽에는 과거에 비해서는 많이 진보했다는 주장을 펼친다. 인정한다.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멈출 이유는 없다. 만족하면 멈춘다. 자신의 기구한 삶을 글로라도 풀어달라는 여성들의 줄은 끝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벼랑 끝으로 하나, 둘.
회사 내 업무 방식에 분노와 불만을 갖는 친구가 이 책을 추천했다. 그 친구의 정신건강을 위해 다들 일에 신경을 덜 쓰라고 말한다. 하지만 무관심은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다. 그런 친구들이 변화를 가져온다. 관심을 끊고 만족하는 순간 정체된다.
하지만 분노는 나를 너무 힘들게 한다. 잔다르크가 되는 일은 어렵다.